살인범 훈련소 11. 악마의 아들
다음 날 아침, S.C.I. 로 출근한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을 맞이한 건 텅 빈 사무실이었다. 두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는데 근처 책상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인기척
을 느낀 장평이 컴퓨터에서 고개를 들며 인사했다.
"애들은? 다 나갔나?"
바이 위탕이 물었다.
장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경은 조호랑 교대하러 갔어요. 듣자 하니 그 계집애 때문에 아주 죽을 지경이라던데요. 그리고
왕조랑 장용은 가정암 감시하고 있고, 공 선생은 아직 안 오셨어요."
"흠흠~~" / "흐흠~~"
공손의 이름이 나오자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헛기침을 했다.
쟌 자오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장평의 거뭇거뭇한 다크써클을 보고는 짐
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밤 샌 거예요?"
"아~~~~"
장평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그 살인 훈련 캠프 정보만 좀 찾아보려고 했었죠. 근데 어디는 누구를 죽여 달라고 하고,
어디는 누구를 죽일 수 있다고 하는 게 너무 많아요. 게다가 방금 전에는 두 명이 자살한다고 예
고까지 있었어요!"
장평의 대답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상자를 품에 안은 백치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
쟌 자오는 싱긋 웃으며 백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 아침이요……. 저, 저 왔어요.”
백치는 쭈뼛대며 바이 위탕에게 인사했다.
"바……바이, 대……장."
바이 위탕은 백치를 바라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이 꼬마는 정말 바이 가(白家) 같지 않군.
"수속은 다 끝났나?"
바이 위탕은 백치 품에 안긴 상자를 보며 물었다.
백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이리와~ 여기 비었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장평이 바로 옆 책상을 빠른 손길로 정리하며 그를 불렀다.
"너나 나나 사무직이니까, 우리 친하게 지내자고."
"네…."
백치는 상자를 안고 장평이 정리한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 쟌 자오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백치의 엉덩이에서 꼬리가 보인 것이다. 게다가 그 꼬리가 기쁜 듯 좌우로 힘차게 꼬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쟌 자오는 헛것을 본 사람처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백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이렇게 갑자기 빠졌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자 백치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한참 동안 손가락
을 만지작거리다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백치는 S.C.I. 로 이동을 알리자마자 얼굴에 활기를 띠며 격하게 축하해줬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밝은 표정 뒤로 아무리 감춘다 한 들 그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은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사람들은 백치와 함께 순찰을 나갈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백치와 함께 근무하기를 거부했고, 결국에는 백치 혼자 순찰을 해야 했다.
"저……저는 뭘, 뭘……하면 되나요? 대……대장."
백치는 용기를 쥐어짜 내며 바이 위탕에게 물었다.
바이 위탕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익숙해지는 게 먼저야. 그런 다음 가장 빨리 너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해. 참, 그리고."
바이 위탕은 백치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장이 아니라 형이라고 불러. 지금까지 형 소리를 들은 적이 없거든."
싱긋 미소까지 곁들여 그렇게 얘기하는 그를 쟌 자오가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바이 위
탕은 쟌 자오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사람도 형이라고 불러." 하고 빠르게 덧붙였다.
그제야 쟌 자오의 얼굴이 풀어지며 "헤헤." 하고 웃음이 지어졌다. 쟌 자오도 백치의 어깨를 토닥였다.
"여기 사람들 모두 형이라고 불러도 돼. 괜찮으니까, 긴장 풀어."
백치는 기쁨에 찬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이번엔 쟌 자오와 더불어 바이 위탕까지 백치의 좌우로 힘차게 움직이는 꼬리가 보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왜 그러지? 온통 헛것이 보이네.
"자오군, 바이군."
두 사람이 눈을 비비고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상황실의 노방이 문을 열고 들어왔
다.
"누가 찾아오셨어요."
노방이 뒤쪽을 가리켰다.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입구에는 한 여성이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동양 사람은 아니었다. 은발과 흰 피부, 얼굴 사
이에 자리한 주름으로 봤을 때 5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옷이나 액세서리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가 있고 비싸 보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바이 위탕이 물었다.
그녀는 힐긋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을 번갈아 보더니, "쟌 박사님과 바이 형사님이신가요?" 하고 물
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두 사람의 기억 속에 이 여성은 없었다.
"이 분은 로라 여사입니다. 윌슨 박사의 부인이시죠."
옆에서 노방이 말했다. 노방의 소개에도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그녀가 왜 이곳까지 온 건지 짐작
이 가지 않았다.
"박사는 사건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며 두 분께 보여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두 분
은 저를 따라 병원에 가시겠어요?"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부인을 따라 S 시의 한 고급 개인 요양원으로 향했다.
"어이! 자오군!"
개인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기대고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윌슨 박사가 한 손을
치켜들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환자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다.
"바이 형사! 어서 오시게. 자넨 내 생명의 은인이야~"
윌슨 박사는 환자가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혈색이 좋았고, 그새 살이 쪘는지 지난번 봤을 때
보다 볼이 빵빵해져 있었다.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어이없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노인은 도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그때 두 사람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님~ 또 담배 피우시는 겁니까? 간호사한테 혼나셔도 전 모릅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윌슨 박사와 함께 그날 파티에서 만났던 존 킹
이 서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서 와. 자, 여긴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네."
서로를 거리낌 없이 대하는 모습에서 윌슨 박사와 존 킹의 사이가 가깝다는 것이 느껴졌다.
존 킹은 바이 위탕과 악수 후, 쟌 자오에게도 똑같이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쟌 자오도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순간, 가볍게 잡은 존 킹의 손이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한 기류를 느낀 쟌 자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악수를 하고 손을 놓기까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바이 위탕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온몸에서 존 킹을 향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쟌 자오는 황급히 바이 위탕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윌슨 박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박사님, 저희에게 보여줄 단서가 있다고 하셨죠?"
그러면서 존 킹을 노려보는 바이 위탕을 필사적으로 소파에 눌러 앉혔다.
그런 다음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쟌 자오는 바이 위탕에게 짐짓 심각한 얼굴로 눈짓했다.
: 좀 진정해. 지금 중요한 일 하고 있잖아?!
바이 위탕은 눈초리를 치켜떴다.
: 만약 이 일만 아니었다면 저 자식은 나한테 죽었어!!
바이 위탕은 윌슨 박사 옆에 앉은 존 킹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순간 존 킹과 딱, 눈이 마주쳤다.
존 킹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펑!
바이 위탕은 존 킹을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때 옆에서 쟌 자오가 팔을 꼬집었다.
바이 위탕은 꼬집힌 팔을 문지르며 쟌 자오를 노려보았다.
: 고양이! 뭐하는 거야?
쟌 자오도 바이 위탕을 노려보았다.
: 싸우면 안 돼!
바이 위탕은 눈을 부릅떴다.
: 저 녀석은 매 좀 맞아야 해!
쟌 자오는 눈을 흘겼다.
: 폭력 쥐!
바이 위탕은 눈을 부라렸다.
: 저 녀석이 너를 희롱하잖아!
쟌 자오는 눈을 부릅떴다.
: 증거 있어??
바이 위탕은 발끈하며 눈을 부릅떴다.
: 흥!
쟌 자오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싱긋 웃었다.
: 착하다~~
"이걸 보여주려고 불렀네."
바이 위탕과 쟌 자오의 눈싸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윌슨 박사는 차분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더
니 옆에 놓인 두 개의 서류 봉투를 두 사람 쪽으로 내밀었다.
"이건……."
두 사람은 재빨리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 확인했다.
각각의 봉투 안에서 사진 한 묶음과 한 장의 카드가 들어있었다.
첫 번째 봉투 속에는 제뇌의 사진이 있었다.
절반은 그가 낮에 베이스를 연주하는, 그야말로 청춘의 한때에 서 있는 대학생의 모습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밤에 저격소총을 들고 있는 냉혹한 모습…….
또 다른 봉투 속에는 양봉의 사진이 있었다.
절반은 낮에 교과서를 들고 있는 평범한 학생의 모습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밤에 베어 죽인 사람
의 피를 뒤집어쓰고, 피에 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두 봉투 속에 들어있던 카드는 검은색으로 두 장 모두 같은 것이었다.
카드의 앞쪽에는 악마의 아들이라는 글자가 핏빛으로 쓰여 있었고,
반대쪽에는 낫을 든 악마의 그림과 영문글자가 쓰여 있었다.
Killer training camp.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 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두 사람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물었다.
"언제 온 거죠?"
"언제 왔습니까?"
그걸 신호로 월슨 박사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
아 보았다.
“오늘 아침, 내 방 입구에 놓여 있었네.”
봉투는 하얀색으로, 주소나 받는 이가 누군지 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바이 위탕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윌슨 박사를 바라보았다.
"이 사진들이 무슨 뜻이죠? 왜 박사님에게 보낸 겁니까?"
윌슨 박사는 흠, 하며 헛기침한 뒤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바이 형사, 자네는 심리학을 연구하지 않아 잘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네. 하지만 자오군,
자네는 이해할 수 있겠나?"
윌슨 박사의 말에 바이 위탕은 짐짓 놀란 듯 쟌 자오를 돌아보았다.
쟌 자오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다 툭 하고 한 단어를 내뱉었다.
"다중 인격."
윌슨 박사는 말없이 파이프 담배를 빨아들였다. 두 모금째가 되어서야 그의 고개가 가볍게 위아
래로 움직였다.
"맞네."
바이 위탕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윌슨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파이프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서 입을 열었다.
"나는 심리에 관련된 많은 책을 서술하였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또 다른 자신 만들
기>이지. 나는 평생 동안 인간의 성격과 행위의 동기를 연구하는 데 전념했다네. 그동안 심리학
계에서는 인격분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질 않았지. 대표적으로 공생(共生) 파와 기생(寄生) 파로
나뉘어 싸웠다네. 애초에 분열은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인격이 하나의 몸을 함께 차지하고 있다
는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공생이란 분열된 인격과 본체가 서로 평등하게 한 몸에서 살아간다
는 것이고, 기생은 분열된 인격이 본체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말이라네."
거기서 말을 끊은 윌슨 박사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론은 이 두 가지 설과 방향을 달리하고 있네. 나는 인격분열 자체가 존재하지 않
는다고 생각하지."
"존재하지 않아?"
바이 위탕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쟌 자오를 바라보았다.
쟌 자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충 설명했다.
"박사의 이론은 심리학계에서 논란을 일으켰어. 심리학계를 들썩이는 논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박사의 이론이 있었다고 보면 돼. 박사의 이론은 인격 분열은 실제로 망상일 뿐이라는 거야. 즉,
뇌가 각각의 사람이 가진 동기에 따라 만들어 내는 허상일 뿐인 거지."
쟌 자오의 말이 끝나자 윌슨 박사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일어서더니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나는 인격 분열은 타고나는 것과 같은 논조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격 분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네."
"그럼 이 편지들?"
바이 위탕이 주저 없이 물었다.
"당신의 이론을 논박하기 위해서군요?"
윌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 위탕과 쟌 자오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뭔가 수상쩍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영광, 돈, 무엇이든지 다 즐기며 살아왔
어. 심지어 사람들이 내 이론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길 때도 있었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어리석게 느껴져. 만약 내 이론을 논박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을 해치려는 거라
면 나는 정말 내 죄가 무겁다고 느끼네."
윌슨 박사는 거기까지 말하고 창문에서 몸을 돌려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을 돌아보았다.
"난 그들을 유인할걸세."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인?"
쟌 자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이 위탕은 의심스러운 눈동자로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박사님은 재활 만찬을 열 계획입니다."
옆에서 존 킹이 끼어들었다.
"심리학계 사람들을 초대해서 말이죠."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는 이게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이 위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험도가 너무 큽니다. 게다가 박사님은 다시 공격받을 가능성도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윌슨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엔 고집스러움이 담겨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나는 내 목숨을 신경 쓰지 않는다네."
윌슨 박사는 두 사람에 두 장의 초대장을 건넸다.
"만찬은 오늘 저녁이네. 두 사람이 오든 말든 만찬은 제시간에 열릴 걸세."
윌슨이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들이 와서 용의자를 찾아 주었으면 해."
그의 말은 정중했지만 사실 그것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이렇게 목숨을 걸다니, 자신을 너무 막 대하는군.
"고양아, 단서가 좀 수상하지 않아?"
요양원을 나와 건물 앞에 주차해둔 자신의 차 문을 열며 바이 위탕이 물었다.
"응."
쟌 자오는 조수석에 올라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회인 것은 확실해. 그 조직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봤을 때 분명 이번 만찬에 참석할 거
야."
"그렇긴 해."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도 한동안 인격분열을 연구하지 않았나? 넌 어느 파였어?"
차를 출발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 위탕이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파도 아니었어."
쟌 자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에 한가하게 시간 보낼 바에 차라리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게 더 유용하잖
아."
"아하~~~"
바이 위탕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 역시 고양이는 고양이야!"
"지금 네가 하는 말은 전혀 논리에 맞지 않거든!"
"어디가 맞지 않는다는 거야?"
"일리가 맞다, 안 맞다 에 고양이는 상관없어!"
"나는 네가 고양이라서 일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럼 넌 무슨 뜻인데?"
"내 말은, 네가 일리가 있기 때문에, 네가 고양이다~ 이 말씀이지! 네가 일리가 있어서 고양이인
것과 네가 일리가 있어서 고양이 인 거 사이에 무슨 오류 있어?"
"당연히 있지!"
"어디가?"
"앞에도 고양이, 뒤에도 고양이잖아, 바보야!"
………………
"너 왜 말 안 했어?"
"망할 쥐니까."
"뭐?"
"넌 망할 쥐니깐 말 안 했다고!"
"…………고양아, 너 말하는 것 좀 배워야겠다!!"
"흥!"
Dididididididididi~~~~~
바이 위탕의 전화가 울렸다.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왕조, 무슨 일이야?"
"대장! 가정암이 죽었습니다!"
"뭐?" / 에?"
놀란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이 동시에 외쳤다.
"어쩌다 죽은 거야?"
"잘은 모르지만, 음독자살 같습니다."
"그래, 알겠어. 우리도 곧 돌아가지."
전화를 끊고 바이 위탕은 핸들을 고쳐 잡으며 경찰청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S.C.I. 사무실 안.
사무실로 돌아온 바이 위탕과 쟌 자오는 장용과 왕조에게 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다.
"이건 무슨 약이지?"
색색의 알약이 든 봉투를 눈높이까지 들고 바이 위탕은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약은 옅은 노란색으로 겉에는 나선형으로 줄무늬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검사 후에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장용이 말했다.
"정말 이상한 놈이에요. 왜 공중화장실에서 자살했을까요?"
"제……제가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백치는 살짝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왕조가 약을 건넸다. 백치는 약을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건 진통제예요."
"진통제?"
바이 위탕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게?" 백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 있게 설명했다.
"어린이용 특제 진통제예요. 제가 작년에 수술했을 때……그때……그……."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백치를 바라보며 팀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린애 보는 듯한 그들의 미소에 백치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너 지금 작년에 수술하고 받은 진통제가 어린이용이라고 말하는 거야?"
왕조는 빙글 웃으며 백치에게 물었다.
"무슨 수술 했는데?"
"………"
눈빛을 반짝이며 묻는 왕조에게 백치는 잠시 망설이다,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다 같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그런 다음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백치
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린이네~
"이,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백치가 목을 움츠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그제야 사건이 생각났는지 바이 위탕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사람들의 주의를 다시 사건으로 집중시켰다.
"가정암은 공중화장실에서 왜 어린이용 진통제를 먹은 걸까요?"
장평이 말했다.
그때였다. S.C.I.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서경과 교대한 조호가 들어왔다.
"진짜 그 계집애, 짜증 나 죽겠어."
조호는 시큰한 목을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그러다 텅 빈 사무실 앞에 당황하고는 발을 멈춘 채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회의실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조호는 달려가 회의실 문을 활짝 열었다.
"뭐 하세요?"
그는 회의실로 쏙- 들어와 다시 물었다.
"무슨 회의에요? 무슨 진전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의실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의 알약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이 약이 여기 있는 거예요?"
"뭐?"
바이 위탕은 한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넌 어떻게 이 약을 아는데?"
조호는 바지 주머니에서 알약이 싸인 휴지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 보였다.
"여기요."
"너 이거 어디서 구했어?"
왕조는 알약을 살피더니 당황한 기색으로 조호를 바라보았다.
조호는 왕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알약을 꺼내고부터 사람들 시선도 이상하게 변해있
었다. 조호는 둥그런 눈으로 천천히 회의실 사람들을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바이 위탕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바이 위탕도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조호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로 뒤로 주춤 물러서며 이렇게 외쳤다.
"대장! 이건 또 무슨 장난치는 거예요?? 저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을 거예요!!!"
조호의 말에 장용은 으이구! 하며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우리 진지한 이야기 하고 있거든!!"
조호는 아아, 하며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이거, 제요가 먹으려고 했던 거예요. 그 천유라는 여자애가 줬거든요."
"걔가 진통제를 왜 먹어?"
왕조의 눈이 커졌다.
"난 알 것 같아요."
쟌 자오가 말했다.
"진통제에는 모르핀 성분이 일정량 들어 있어요. 한 개로는 소용없지만 여러 개를 한꺼번에 먹는
다면 환각을 겪을 거예요."
바이 위탕은 흠,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럼 제요는 마약 대신 진통제를 먹은 건가?"
"완전히 대체 하지는 못할 거야."
쟌 자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
"중독 증상을 줄일 뿐이지. 다만……, 이 약도 많이 먹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어."
"즉, 어린이 진통제를 먹으면 마약보다 환각이 줄어드는 데다 많이 먹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
는 건가?"
바이 위탕은 색색의 알약을 다시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정암은 마약에 중독된 거야. 학교에서는 마약을 할 수 없으니 아마 진통제를 통해 중독 증상
을 좀 완화하려고 했던 거겠지. 교직원 공중화장실은 오는 사람도 적으니 적당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말이야."
"그럼 가정암은 얼마나 먹고 죽은 걸까요?"
장평이 물었다.
"그건 사체의 약물 검사만 하면 알 수 있어."
왕조가 말했다.
"문제는……."
……사람들은 바이 위탕과 쟌 자오를 돌아보았다.
"공 선생은 어디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채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무언가를 주고받더니 팀원들을 돌
아보며 동시에 말했다.
"병가에요." / "몰라."
다시 힐끗 쳐다보고,
"몰라요." / "병가야."
찌릿!
팀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바이 위탕은 헛기침을 하고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공 선생은 휴가를 냈으니 다른 법의관에게 부탁하자고."
'뭔가 있어.'
'으~ 궁금해!'
'…뭘까?'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회피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팀원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높이 떠오른 태양의 햇살도 두꺼운 커튼을 뚫을 수는 없는 듯 방안은 밤이라 착각할 만큼 어두웠
다.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대 위에 한 사람이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서늘할 정도로 창백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바이 유탕은 침대 맡의 은은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없
이 내려다보다 혹여 창백한 피부가 추워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 실내 온도를 높였다.
어젯밤은 자신이 생각해도 도가 지나쳤다……
바이 유탕은 침대 근처의 일인용 소파에 앉아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반성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그가 처음 하는 반성이었다.
가슴이 묵직한 것을 얹은 듯 답답했다.
어젯밤에는 분명 자신의 소원대로 이뤄졌다. 하지만 소원을 이뤘다는 기쁨보다 공손이 어떤 반응
을 보일지 몰라 두려웠다. 차라리 평소처럼 자신에게 화내며 메스를 휘두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
았다.
그때였다.
침대 위의 사람이 몸을 뒤척였다. 바이 유탕은 긴장으로 등을 곧추 세웠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를 응시했다.
공손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이 깜깜했다. 몇 번 눈을 깜박거리자 정신이 맑아지며 시야의 초점
도 점점 맞아갔다.
그는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 다른 건, 보
이지 않았다.
공손은 숨을 크게 내쉬며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
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공손은 한쪽 팔로 침대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평소라면
간단했을 동작이 지금은 상당한 무리로 다가왔다.
"……으윽……"
허리 아래에서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왔다.
하반신은 마비된 듯 무감각했고, 온몸은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이 아팠다.
공손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어젯밤은…….
갑작스럽게 받게 된 바이 유탕의 고백과 기절. 기억은 거기서 끊겨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침
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바이 유탕이…….
"괜찮습니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공손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바이 유탕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공손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손의 얼굴에는 분노도 그 어떠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평온한 모습에 오히려 바이 유탕 쪽이 더 당황했다.
"저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먼저 입을 열긴 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공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난 사실 당신을 싫어하지 않았어요."
공손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바이 유탕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언제나 안전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당신이 옆집으로 이사 온 뒤
부터는 매일 밤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어요.”
"공손……."
바이 유탕은 애절한 목소리로 공손을 부르며 그의 뺨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공손이 그의 손
길을 거부하듯 고개를 숙여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너무 무서워요.”
바이 유탕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공손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한테 한 짓은 절대 용서 못 해요."
그러면서 공손은 고개를 들고 바이 유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젯밤 일은, 지난 번 당신이 나를 구해준 빚을 갚은 셈 칠게요. 그러니…… 앞으로는 당
신을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단호한 선고.
바이 유탕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공손……."
바이 유탕은 다시 손을 뻗었다. 떨리는 공손의 어깨를 어떻게든 감싸주고 싶었다. 하지만 공손의
차가운 눈빛에 그만 겁을 먹고 말았다.
자신이 겁이라니…….
바이 유탕은 손을 다시 거두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나를 건드리면, 그때는 내 시체를 보게 될 거예요."
공손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주위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좀 더 쉬는 게……."
상처 입은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공손을 보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이 유탕은 억지로 공손을 침대에 눕혔다. 몇 번이고 반항하는 그를 바이 유탕은 힘으로 눌렀다.
그리고는 목까지 이불을 덮어준 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좀 더 누워 있어요. 제가 나가겠습니다!"
바이 유탕은 방문을 연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듬직했던 등이 한없이 왜소해 보였다.
강제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가
당신을 좋아해서 그랬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미안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몰랐습니다."
바이 유탕은 고개를 돌려 공손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차 있었다.
"그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알았지만 잊어버렸던 거겠죠."
그 말을 끝으로 바이 유탕은 문을 닫고 나가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공손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이 유탕, 왜 좀 더 기다릴 수 없었던 거예요……
…………
"심리학자들은 모두 돈이 많냐?"
바이 위탕은 눈앞의 고급스러운 별장을 올려다보며 빈정거리듯 쟌 자오에게 물었다.
쟌 자오는 "취향이잖아?" 하며 엉뚱한 대답을 내놓고는 별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웨
이터는 두 사람을 별장 안쪽으로 화원으로 안내했다.
화원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서 윌슨 박사는 사람들과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쟌 박사님, 또 만났네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쟌 자와 바이 위탕은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 샴페인
을 들고 방욱이 서 있었다. ----이건 정말 대어군.
방욱의 옆에는 존 킹도 있었다. 바이 위탕은 그를 경계하며 눈을 흘겼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
도 존 킹과 눈이 맞았다. 싱긋 웃으며 건네는 눈인사가 도전장처럼 느껴졌다.
"바이야, 나 음료수를 마시고 싶어."
쟌 자오는 표정이 굳어진 바이 위탕의 팔을 잡아당기며 황급히 주의를 돌렸다. 그러면서 방욱과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뜻으로 눈짓했다. 바이 위탕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존 킹이 먼저 다가왔다.
"음료수는 저쪽에 있어요. 제가 안내해 드리죠."
바이 위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쟌 자오에게 조심하라며 눈짓으로 주의를 준 후 존 킹을 따라
나섰다.
방욱은 존 킹과 바이 위탕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사람들을 지나 정원 쪽으로
사라지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말을 걸기 위해 고개를 돌린 쟌 자오는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신 친구가 존 킹이랑 함께 가도 괜찮겠어요?"
방욱이 갑자기 물었다.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했다.
"음료수 가지러 가는 것뿐이잖아요?"
"아아……."
방욱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의 반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음료는 저쪽에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럼 지금……."
쟌 자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귓가에 방욱이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알기로는 존 킹이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 당신 친구예요……."
쟌 자오는 순간 멍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정원 쪽으
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으며 방욱의 표정이 변해갔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매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그는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월슨 박사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잔혹하리만치 차가운 미
소가 떠올랐다.
존 킹을 따라 정원 깊숙이 들어오고 나서야 바이 위탕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음료수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만?"
바이 위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사람도, 만찬의 화려한 불빛도 없었다.
앞서가던 존 킹의 발이 갑자기 멈췄다. 그는 빙글 몸을 돌리고는 바이 위탕과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사건이 있던 날,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존 킹의 말에 그날을 떠올리듯 바이 위탕은 허공을 올려다봤다. 잠시 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
렇게 말했다.
"제가 구해준 것도 아닌데요."
"아……."
존 킹은 어색하게 눈동자를 한 바퀴 돌리더니 다시 바이 위탕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손을
뻗어 바이 위탕의 턱을 가볍게 잡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당신 정말 귀여워~~"
이윽고 그의 입술이 바이 위탕 입가로 다가왔다. 바이 위탕은 털을 곤두세우며 발을 들었다. 하지
만 그보다 한 번 먼저 어둠 속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온 검은 물체가 날린 발차기에 존 킹은 바닥으
로 나가떨어졌다.
"으헉!!"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존 킹은 옆구리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서 뒹굴었다.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이 위탕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 앞에 눈을
깜박거리다 천천히 검은 물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쟌 자오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날카롭게
존 킹을 노려보고는 바이 위탕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는 왜 반항도 안 해?"
쟌 자오는 분이 안 풀리는지 걷는 내내 씩씩거리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젠장! 좀 더 두들겨 패서 완전 인간도리도 못 하게 만드는 거였는데!!"
"고양아."
바이 위탕이 쟌 자오를 불러 세웠다.
쟌 자오는 발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이 위탕은 믿기지 않은 다는 듯한 얼굴로 쟌 자오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질투한 거지?"
"뭐?!"
쟌 자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에 덴 것 마냥 빨개졌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나는……. 맞, 맞아! 너는 킥복싱 챔피언 이면서 왜 가만히 있던 거
야?? 널 희롱하고 있었잖아!"
쟌 자오는 화제를 돌리며 퉁명스러운 목소리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바이 위탕은 저
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말았다.
"내가 손 쓸 시간도 없지 않았던가?? 맹수처럼 달려든 누구 씨 때문에 말이야."
"흥!"
쟌 자오는 눈을 부릅뜨고 생쥐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보며 실실 웃고 있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잡고 있던 바이 위탕의 팔
을 내팽게치고 만찬이 열리는 정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쥐새끼! 그렇게 잘 났으면 술집 가서 사람들 꼬시면서 놀던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해대는 욕을 들으면서도 생쥐의 꼬리는 하늘로 치켜 올라가 내려올 줄 몰
랐다.
- 장중첩증 : 아랫 부분의 장이 윗 부분의 장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질환입니다. 옛날 해적들이 쓰던 망원경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망원경을 접는 것처럼 장이 장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질환을 장중첩증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24개월 이하에서(전체 환자의 80%) 발생하며, 그 중 특히 12개월 이하에서(전체 환자의 60%) 많이 발생하고, 5-11개월사이의 환아가 가장 많습니다. 여아보다 남아에서 더 많이 발생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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