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 훈련소 12. 운명
만찬 장소로 돌아온 두 사람의 눈에 방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쟌 자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도망갔네."
바이 위탕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이 고양이한테는 내가 가장 중요 했던 거야.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을 실실 웃어대자 쟌 자오가 그를 노려보았다.
시간이 흘러 만찬이 무르익었을 때쯤,
윌슨 박사는 화원 한쪽에 마련된 무대로 올라가 무대 중앙에 서서 샴페인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여러분이 오늘 와주셔서 저는 정말로 기쁩니다. 이번 경험은 심리학자에게 심장이 얼마나 중요
한지 깨닫게 해 주는 계기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상! 건배합시다!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외치며 윌슨 박사는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를 따라 사람들도 술을 들이켰다.
잔이 없는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당연히 마실 필요가 없었다.
그 덕분이랄까, 그들은 우연히 심상치 않은 장면을 목격했다. 윌슨 박사의 부인, 단정하고 다소곳한 로라 여사가 휘청거리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윌슨 박사에게 다가간 것이다.
섬뜩한 기운이 스쳤다.
“위험해!”
바이 위탕이 무대로 달려가며 크게 소리쳤다.
로라 여사가 칼을 높이 치켜들자 바이 위탕은 다시 소리쳤다.
“위험해!”
처음 바이 위탕의 외침을 듣고 멍해졌던 윌슨 박사는 바이 위탕의 두 번째 외침을 듣고, 번쩍 정
신을 차리며 몸을 틀었다. 그 순간 윌슨 박사의 정면으로 향하던 칼이 옆구리에 와 꽂혔다.
치명상을 피한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로라 여사가 다시 칼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휘두르는 칼이 다시 윌슨 박사의 정면으로 향했다. 그 순간 바이 위탕이 몸을 날려 그녀를
덮쳤다.
쿵, 하고 두 사람은 무대로 쓰러졌다.
로라 여사의 손목을 강하게 누르자 힘이 풀리며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칼을 멀리 쳐내려고 했지만 로라 여사의 몸부림을 제지하기도 벅차올랐다.
잠깐 만나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다소곳하고 품위가 넘쳐흐르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도저히 이 나이 때의 여자가 내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뭔가 이상해.’
바이 위탕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경비
원들이 있었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야? 빨리 와서 좀 도와!”
바이 위탕의 고함에 경비원들은 꿈에서 깨듯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은 바이
위탕을 도와 로라 여사를 붙잡는데 안간힘을 썼다.
그 사이 쟌 자오는 소방서와 경찰서에 사건 발생을 알렸다.
칼에 찔린 뒤 무대에 쓰러진 윌슨 박사는 복부를 움켜준 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로라 여사는 성인 남성 여럿에게 압박당한 채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윌슨 박사는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자신을 살피는 경비원에게 부탁했다.
“그녀를, 그녀를 해치지 말아 주게…….”
잠시 뒤, 출동한 구급차에 윌슨 박사가 실려 나가고, 로라 여사는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바이 위탕이 먼지를 털며 쟌 자오 곁으로 다가갔다.
“고양아, 네가 보기엔 어때?”
쟌 자오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너무 이상해…….”
“맞아.”
바이 위탕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귀신 들린 것 같더라. 힘도 정말 세던데. 저 나이대의 여자가 그렇게 힘이 셀 거라고는 생
각도 못 했어.”
“귀신이 들려?”
쟌 자오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바이 위탕을 돌아보
았다.
“사람이 바뀐 것처럼 말이지?!”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바이 위탕의 손이 멈칫했다.
“사람이 바뀌었다고?”
쟌 자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방욱이 없어졌어.”
바이 위탕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번 일은 이상해.
바이 위탕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S.C.I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나가고 전
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그 목소리에 바이 위탕은 잠시 당황했다.
「백치야, 사무실에 너 혼자야?」
“……아, 네.”
사무실을 둘러보며 백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있는 건 아니었다. 옆자리의 장평은 책상에 엎드린 채 침을 흘리며 자고 있
었고, 조호는 사무실 중앙 소파에는 밤새도록 제요에게 시달렸던 만큼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
었다. 그러니 혼자 있는 건 아니었고, 혼자 '깨어' 있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일단 네가 당장 S 시 병원으로 가.」
전후 사정 설명 없이 바이 위탕은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윌슨 박사를 실은 구급차가 곧 그쪽으로 갈 거야. 네가 먼저 가서 기다렸다가 나한테 상황 보고
해.」
“아, 저기…….”
백치가 대답도 하기 전에 바이 위탕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뚜 거리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백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평은 여전히 침을 흘리고 있었고, 조호는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봤지만 좋은 수가 생각나는 것도 아니었다.
백치는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사무실 안.
백치가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호가 몸을 일으켰다. 장평도 얼굴을 들었다.
“저 녀석, 혼자 가도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백치가 나간 사무실 문을 바라보며 조호가 묻자, 입 주위의 침을 손등으로 닦
으며 장평이 대답했다.
“강하게 키워야지.”
순조롭게 진행되던 만찬 행사장에 경찰이 몰려들었다.
그의 퇴원을 축하해주려 모였던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윌슨 박사의 퇴원 축하 만찬이 윌슨 박사의 부상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존 킹은 의자에 주저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현장을 둘러보는 바이 위탕에게 한 경찰관이 다가와 작은 핸드백을 건넸다.
내용물을 확인한 바이 위탕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쟌 자오가 곁으로 달려오자 바이 위탕은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색색의 알약이 반 정도 들어 있는 작은 약병이었다.
핸드백에는 카드도 한 장 들어있었다. 오늘 오전, 윌슨 박사에게 보내진 카드와 같은 것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빨간 글씨, 그리고 낫을 든 악마.
그건 살인범이 경찰의 눈앞에서 범죄를 성공시켰다는 의미였다.
바이 위탕과 쟌 자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성분 감식 요청해.”
바이 위탕이 옆에 있던 경찰관에게 약병을 건네고 나자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Didididdididi~~~~~~
「여보세요?……형…….」
“백치? 박사는 좀 어때?”
바이 위탕은 초조한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요.」
백치는 조금 전 자신이 의사에게 들은 것을 차분히 보고했다.
「목숨은 지장 없데요…….」
바이 위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쟌 자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
백치는 할 말이 더 남아 있었다.
「그 박사님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도 계속 말한 게 있어요. 그…… '악마의 아들'이라고.」
바이 위탕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되물었다.
「악마의 아들?」
“네…….”
백치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은 없었어요.”
「좋아, 아주 훌륭해!」
바이 위탕이 말했다.
「박사를 보호하러 경찰들이 곧 그쪽으로 갈 거야. 이제 너는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조심하고.」
“네.”
전화를 끊자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자리를 뱅글뱅글 맴돌며 조금 전 바이 위탕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아주 훌륭해!”
슈퍼맨 형이 칭찬해줬어~~~~
백치는 폴짝폴짝 뛰며 병원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요금이 너무 비싸~~~
지하철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백치는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막차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병원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오느냐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으로 몸은 나른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가장 기쁜 날이었다.
머리를 뒤로 살짝 젖히며 오늘 있었던 즐거운 일을 떠올렸다.
아침에는 S.C.I.로 이동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팀원들의 실력은 모두 뛰어났다.
오후에 있던 회의에서는 조금이지만 도움이 됐고, 밤에는 (별로 위험하진 않았지만) 혼자서 임무
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게다가 바이 위탕의 칭찬도 받았다. 마지막에는 막차에 올라타는 데 성공!!
오늘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거야!!
호흡이 가라앉자 백치는 그제야 자신이 객차에 혼자 있는……게 아니구나, 저기 또 한 명 있네.
백치와 그리 멀지 않은 맞은편 좌석 위에 한 사람이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 사람은 흰색 스웨터와 흰 반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다소 길게 자라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백치는 그 단어를 떨쳐내듯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지하철에 귀신이라니~~~ 말도 안 돼. 정신 차려!! 나는 경찰이야!!
용기를 내보고자 두 주먹을 불끈 주고 일어났건만, 발걸음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누워있는 사람에게로 조심히 다가갔다.
그 사람이 등받이 쪽으로 몸이 돌리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선, 선생님…… 선생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불러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심호흡하고 목소리를 조금 키워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왜 반응이 없지? 아니야, 괜찮아! 얼굴이 없거나 사다코 1라도 괜찮아!
마음의 준비를 마친 백치는 크게 심호흡하며 누워있는 사람을 일으켜 앉혔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눈, 코, 입 다 있어! 게다가 사다코 같지도 않아!
백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살피다 자기도 모르게 툭 말이 튀어나왔다.
“잘생겼다~~”
남자는 젊지 않았다. 하지만 마른 골격에 흰 피부, 입가 뻗은 옅은 팔자 주름까지.
뭐랄까…… 약간의 세월의 흔적과 함께 섹시함이 느껴졌다.
이 얼굴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은 느낌이었다.
“괜찮으세요?”
백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얼굴에서 반응이 없었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미…….
백치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붙잡고 살며시 손가락을 내밀었다. 코 밑에서 내뱉는 숨이 느껴졌
다. 휴- 안심한 백치는 손을 거두다 남자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남자가 백치의 손가락을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히익~~~~~”
백치는 경기를 일으키며 뒷걸음치다 제 발에 걸려 땅바닥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백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배를 움켜잡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의 어깨가 부들거리며 떨려왔다. 소리는 없었지만, 백치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린 게 틀림없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비스듬히 고개를 틀며 살짝 드러난 눈에 반짝이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백치는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바보처럼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소리 없이 웃던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세를 바로 하
고 백치를 가만히 응시했다.
백치도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남자는 백치와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보내며 장난스럽게 자신의 윗입술을 핥았다.
백치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졌다. 벌떡 일어서며 남자에게 따지고 들었다.
“처, 처음부터…… 날 속인 거였어!!”
백치는 휙 하고 몸을 돌리며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남자가 백치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백치는 “어어어” 하며 그대로 끌려가 그의 팔에 허리가 붙잡히고 말았다.
“배고파~~~”
백치의 허리에 머리를 비비며 남자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위가 아파~~~”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버둥대던 백치는 귀에 메아리 치는 남자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정말 신비롭다……
백치는 마음을 바꿨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며 매달릴까 싶어 그가 안쓰러워졌다.
정말 배가 고픈 걸지도 몰라.
“먹……먹을래요?”
백치는 남자 옆에 앉아 가방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초콜릿과 백치를 번갈아 보던 남자가 먹이를 바라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아~~”
그의 행동에 백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하며 손수 초콜릿의 비닐 포장을 벗겨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입을 우물거리며 맛있다는 듯이 먹던 남자는 초콜릿을 다 먹자 다시 백치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또 줘.”
“어……어떻게 더 있다는 걸…… 알았어요??”
신기한 듯 둥그레진 눈을 깜박거리며 묻는 백치에게 남자는 몸을 더 가까이 기댔다.
“또 줘~~~”
백치의 가방 안에 있던 도브(Dove) 초콜릿 네 개가 모두 남자의 입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남자를 보자 백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부루퉁하게 물었다.
“당, 당신은 왜…… 사람을 놀래 킨 거예요?”
남자는 대답 대신 백치의 목덜미에 코끝을 문질렀다. 백치는 간지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병원 냄새."
백치의 눈이 커졌다.
“어……어떻게 알았어요?”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씨익 웃었다.
백치는 이 남자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미친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미친 것 같지 않아……
“나는 백치라고 해요.”
백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자기소개를 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힐끗 백치를 돌아보더니 또 다시 배를 잡고 웃기 시작
했다.
백치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변했다.
“그, 그래요……! 백치에요! 치달리다 할 때의 치라구요!!”
갑자기 웃음을 멈춘 남자가 백치를 빤히 보며 물었다.
“네!”
백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요?”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는 백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안 알려주~지.”
………………
됐어, 괜히 나선 내가 바보지! 이제 말 안 해!
“너는 무슨 고민이 있어?”
남자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먹을 거 줬으니깐, 네 고민 들어줄게.”
“괜찮아요.”
백치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쟌 자오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 다 사람의 마음
을 꿰뚫어 본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그…… 악마의 아들…….”
엉겁결에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자신의 가장 큰 고민이라면, 병원에서부터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이 단어 밖에 없었다.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고민에 대해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
다.
“알겠어요?”
남자는 백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신의 아들이 되지 못한다면, 악마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어.”
남자의 손가락이 백치의 이마에 닿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백치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지하철이 다음 정거장에 들어서며 서서히 멈춰 섰다.
남자는 백치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일어서더니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너는 선택할 수 있어.”
남자의 입술이 백치의 머리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다음에 또 봐.”
어안이 벙벙한 백치를 흘끔 쳐다보고 나서 남자는 작별 인사를 건네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뒤늦게 정신 차린 백치가 급히 달려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이름이요~~~”
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대며 멀어져가는 남자를 향해 외쳤다.
지하철이 움직이자 백치는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승강장에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백치는 몇 번이고 칸을 뛰어넘어 달려갔다.
그러다 순간, 자신이 이미 수수께끼에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발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빠르게 멀어져가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도 승강장에 서
서 가만히 백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지며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기 직전, 남자는 집게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리며 백치에게 미소 지었다……
새벽이 가까워질 즈음,
바이 위탕과 쟌 자오는 현장 조사를 일단락 마무리 짓고 S.C.I.로 돌아왔다.
“너 뭐야?”
바이 위탕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달려오는 조호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한 것이다.
“아! 대장, 이제 오시는 거예요? 저, 저는 갈게요!”
조호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를 황급히 뛰어들었다. 바이 위탕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돌아
보았다.
“너는 어디 가는데?”
“제요한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무언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긴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눈을 부릅뜨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단번에 조호가 왜 그렇게 귀신이 쫓기듯 도망갔는지 깨달았다.
사무실 중앙 소파에 검은 오로라를 내뿜으며 바이 유탕이 앉아 있던 것이다.
저기압이군.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살금살금 걸으며 바이 유탕 곁으로 다가갔다.
“형, 왜 여기 있어?”
바이 유탕은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검은 오로라가 더 짙어진 것
같았다.
바이 유탕을 피해 가능한 먼 곳으로 피신해 있던 장평이 두 사람에게 입을 뻐끔거리며 법의실을
가리켰다.
바이 위탕과 쟌 자오는 '맡겨 둬' 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법의실로 가 공손을 만나 볼 생각에 몸을 돌렸다. 하지만 굳이 나갈 필요가 없어졌
다. 공손이 사무실 문을 열며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한 손에는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인사를 건네려던 두 사람은 공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하루 사이에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여위어,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힘
들어 보였다.
“공 선생님…….”
쟌 자오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공손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를 부축하고 싶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가정암 검시 보고서랑 약물 분석이야.”
자신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애써 무시한 채 공손은 바이 위탕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
두 사람의 입이 벌어졌다.
“이렇게나 빨리?!”
“가정암의 사망 원인은 사이안화물(Cyanide) 3중독이야.”
“?”
두 사람은 멍해졌다.
“그 약에 들어 있던 게 사이안화물이라는 겁니까?”
공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알약마다 다 다른 성분이 들어있었어. 가정암이 먹은 건 독극물인 사이안화물이 들어 있었고, 조호가 가지고 온 것은 마약 일부가 들어있긴 했지만, 약제와 혼합된 것이기 때문에
통증을 가라앉히는 데 사용하는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네가 사람을 통해서 보낸 것은 사이안화물 가루를 높은 비율로 섞어 만든 환각제였어.”
“환각제?”
바이 위탕은 미간을 찌푸렸다.
“환각을 일으켰다는 겁니까?”
공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것도 강하게 말이야.”
“가정암을 사망케 이르고, 로라 여사가 윌슨 박사를 공격한 것은 사이안화물을 먹었기 때문이었
군요.”
쟌 자오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또 나온 게 있습니까?”
바이 위탕이 공손에게 물었다.
“지금은 이 정도가 다야.”
말을 마친 공손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머리가 핑 돌며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책상을 양손으로 짚으며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붙잡았다.
눈을 감고 숨을 깊이들이 내쉬자 어지러운 느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한편,
들어올 때부터 공손을 주시하고 있던 바이 유탕은 공손의 몸이 휘청거리자 황급히 달려갔다. 두 손을 내밀며 공손을 붙잡으려던 그의 손이 공손의 바로 앞에서 멈춰서 버렸다. 더 이상 손을 내밀지도, 그렇다고 거두지도 못한 채 바이 유탕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쟌 자오와 바이 위탕은 당혹스러웠다. 두 사람은 공손과 바이 유탕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어지러움이 사라지자 공손은 천천히 책상에서 손을 떼며 허리를 폈다. 사무실 문 쪽으로 몸을 돌
리는 공손의 팔의 쟌 자오가 붙잡았다.
"좀 쉬는 게 좋겠어요.”
쟌 자오는 자신의 사무실의 소파에 공손을 누울 수 있도록 도와준 뒤 담요를 덮어주었다.
바이 유탕은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옆에서 바이 위탕이 물었다.
“형, 공 선생이랑 무슨 일 있었어?”
대답이 없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신의 형에게 바이 위탕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형, 설마 어젯밤에 억지로 한 건 아니겠……."
그제야 바이 유탕이 얼굴을 들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바이 유탕은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말했다.
“공손은 이따가 내가 집에 데려다 줄 거야. 그러니 내가 잠시 나갔다 오는 동안 얌전히 있으라고 해.”
바이 유탕은 성큼성큼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형님은? 간 거야?”
사무실 문을 조용히 닫으며 쟌 자오가 물었다.
바이 위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 선생은 어때?”
“열이 있어. 병원에 가자고 했는데, 안 간다고 하네.”
쟌 자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이 위탕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바보 고양이.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병원에 가냐.
“의무실에서 소염제랑 해열제 좀 가져다 줘.”
“응.”
쟌 자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빠르게 걸어 나갔다.
쟌 자오의 사무실 문앞에서 바이 위탕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한참을 맴돌았다. 이윽고 그는 쟌 자오의 사무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공손은 눈을 감고 사무실 책상 맞은편에 위치한 소파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긴 했지만, 그건 자려는 것보다 사람을 마주 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거부였다.
바이 위탕은 그런 공손에게 다가가 가만히 옆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음…….”
다소 거친 손길로 머리를 긁적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했다.
“공 선생, 잠깐만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공손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바이 위탕이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참으로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바이 위탕은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고양이처럼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바이 위탕은 자신의 소매를 걷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그의 손목에는 오래돼 보이는 옅은 핑크빛의 흉터가 여러 개 있었다. 손톱으로 할퀸 자국처럼 보였다.
공손은 흉터를 내려다보다 ‘이게 뭐?’ 하는 얼굴로 바이 위탕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은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한 적이 한 번 있어요. 공 선생도 아시죠?”
공손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바이 위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형은 2년이라는 시간을 치료하는 데 썼어요. 하지만 치료가 끝났음에도
형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죠. 저랑 고양이는 형이
돌아온 뒤부터 자주 시간을 보냈어요. 한번은 저랑 고양이가 집을 나가겠다고 형한테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때 형은 우리를 수면제로 재워 방이 가뒀어요. 우리가 정말로 떠나 버릴까 봐 두려웠던
거예요. 그리고 이 흉터는 제가 7살 때, 제가 형이랑 싸우다 “형 따위 필요 없어”라고 했거든요.
그 순간 갑자기 형이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아서……. 아버지가 나서서 저희 둘을 떼어놓으
려고 했지만, 형은 제 손목을 놓지 않았어요. 결국엔 아버지가 형을 억지로 잡아당겨서 저희 둘을
떼어 놓으셨죠. 이 상처는 그때 생긴 거예요. 형은 필사적으로 제 손목을 붙잡으려 했고, 떨어지
는 마지막 순간에 형의 손톱이 제 손목을 긁어버렸죠.
그 일 이후 어른들은 저랑 고양이가 형이랑 같이 있으면 위험할 거라며 형을 해외로 보내 버렸어
요. ……가족끼리 서로 연락하며, 왕래하게 된 것도 성인이 된 이후부터에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이 위탕은 말을 이었다.
“저랑 고양이는 형을 많이 좋아했어요. 하지만 저희도 어렸기 때문에, 그런 형을 보는 게 조금 두
려웠죠. 형은 여전히 다른 가족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요.”
바이 위탕은 미소를 지었다.
“듣자 하니 형은 밖에서 무슨 형님이니, 패거리의 우두머리라니, 혹은 마피아? 라고 하던데, 솔직
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요컨대 형은 인간의 정 따위는 필요 없고, 단지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
하는 일만 필요로 하죠. 예전에 제가 공부할 때 형이 우리를 보러 온 적이 있어요. 다행히 고양이
는 세심한 편이라 형한테 계속 편지를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우리를 만나러 온 형이 자신의 병
명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어요. 그게, 전문 용어로 심리 불완전 이래요 4.”
“아마도 형은 좋아한다는 것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을 테죠.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형은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어요. 좋아하면 할수록 그 마음과 비례해 두려움도
커졌을 거고……. 형은 좋아하는 사람을 꽤 극단적인 방식으로 잡아두려고 할지도 몰라요.”
유리창 너머로 쟌 자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이 위탕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사무실 문에 이르러 공손을 돌아보았다.
“저는 형이 더 이상 아무도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 선생, 당신이 형에게 메스
를 던진 첫 번째 사람이에요. 형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쟌 자오가 사무실 문을 열자 바이 위탕이 나오려는 듯 문 앞에 서 있었다. 팔꿈치까지 말려 올라
간 소매 밑에 익숙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쟌 자오는 바이 위탕에게 싱긋 웃어주며 바톤터치 하듯 안으로 들어갔다.
공손에게 따뜻한 물과 약을 먹이고, 담요까지 다시 잘 덮어준 뒤 사무실을 나섰다. 조심스럽게 문
을 닫고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바이 위탕이 껴안았다.
“너 왜 그래?”
쟌 자오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바이 위탕은 미소 지으며 쟌 자오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했다.
“고양아, 만약에 너 없어지면 나는 어떡하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쟌 자오는 씨익 웃어보이며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
락을 양손으로 마구 문질러주었다.
“이 멍청한 생쥐 같으니!!”
공손은 목까지 덮인 담요를 잡아당겨 머리까지 덮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S시 교외의 한 폐공장,
아무도 없어야 하는 공장 안에서 가슴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차가운 시멘트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한 남자가 필사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내가 다 말할게요. 전부 다 말할게요. 제발, 제발…….”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애 땐 얼굴은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남자는 S시에서 암암리 이뤄지는 무기 거래의 밀매업자와 밀수업자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 총을 사 갔다고!”
“진작 입을 열었으면 좋잖아, 진짜~~ 사람 힘들게 하고 말이야~~"
어둠 속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며 두 개의 똑같은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쌍둥이는 공장의 한구석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다 들었지? 경찰!?”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이 이름, 너희들한테 꽤 쓸모 있지 않나 싶은데~~”
쌍둥이의 웃음기 배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어 쌍둥이의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돌아간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남자는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인물을 경계하며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쌍둥이가 돌아갔다는 확신이 들자 온몸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힘겹게 전화기를 꺼내들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경? 그래, 나 한창(韩彰)이야. 네가 저번에 부탁한 총의 출처를 추적하던 중 매수자
를 알아냈어. 그래, 매수자는 존 킹 이야.”
…………………………
지옥의 세 퓨리(세 자매의 복수의 여진 - 머리카락은 뱀이고 날개를 닮)가 피를 뒤집어쓴 채 한
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골격과 몸가짐을 한 그들의 허리를 푸르디푸른 히드라가 칭칭 감고 있었고, 작은 실뱀들과 뿔 달린 뱀들이 머리털처럼 자라나 잔악한 관자놀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뱀들은 손톱으로 서로 가슴을 찢고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러 댔다.
여기도 사방이 무덤들 천지였다. 단 이곳은 더 끔직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무덤들 사이로 솟아올
라 가장 뜨겁게 달군 쇠처럼 무덤을 내내 뜨겁게 만들었다. 무덤의 뚜껑은 다 열려 있었는데, 슬
픈 한탄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분명 고문당하는 영혼들의 소리였을 것이다.
———————《신곡》지옥 제 6곡
손 안에 있던 알약을 쏟아내자, 그것은 마치 생명을 가진 듯 통통 튕기며 굴러갔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운명의 굴레 속에서 발버둥치는 생명과 비슷해 보였다.
“왜 너만 불행한 거야? 왜 너만 외로워야 하는 거야?”
* 신곡 번역을 인용한 책 (세계문학전집 150 - 신곡 지옥편)에는 9곡에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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